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건적의 난 (문단 편집) === 한나라 쇠퇴의 본격적인 기점 === 황건적의 난의 의의는 내부적으로 쇠약해있었던 후한의 세력을 대내외적으로도 크게 위축시켰다는 시발점과 [[군웅할거|중국 각 지역의 군웅들이 할거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붕괴 후 혼란기|난세의 시작]]'''인 것이다. 이 시기부터 시작된 중국 내부의 혼란은 589년 [[수나라]]의 문제 양견이 중국을 다시 재통일할 때까지 무려 400년 이상 이어졌다. 즉, '''황건적의 난은 보통 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서막을 장식하는 대사건이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부터 후한 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황건적의 난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한나라의 중앙정부(조정)가 지방 통제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중세시대 제국에게 있어 "교통과 통신수단의 제약 속에서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 중 하나였고,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위축될 경우 지방에 대한 통제력 역시 함께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한 왕조는 황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이 실추'되고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방의 통치기구들이 군사력을 확대하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상실하게 된 것이다. 즉, 이전까지 한나라 낙양 조정의 영향력 아래있던 '지방관'들이 황건적의 난 이후에는 '군웅'(=군벌)으로 변모한 것이다. 한나라 이전의 통일제국인 진은 아직 통일제국의 체제가 정착되기 전에 영향력을 상실했기에 진나라의 쇠퇴기에 나타난 현상은 '지방 세력의 독립'이라기보다는 '진에 병합되었던 6국의 부활'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이후 [[오대십국시대]]로 대표되는 당•송 교체기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난 통일제국 멸망사의 효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후 시대에 비해 진-한-당 시대에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지면 바로 지방세력들이 '''독립''' 해 나가면서 제국이 분해되어버리는 현상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송나라의 멸망 이후 송-원-명-청 교체기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없지만은 않았고 지방세력의 독립 현상은 간간히 나타났다. [[이자성]]과 청나라에게 치명타를 입은 이후 [[남명]] 정권의 분열상이라거나, [[삼번의 난]],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 성립기에 다시 대규모의 군벌 난립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나 원말•명초에 등장한 여러 군벌들의 사례가 있다. 다만, 존속기간이 실질적으로 겨우 한세대에 불과한 진나라나 수나라는 빼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멸망사와 이후 시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멸망사를 보면 상당히 의미있는 특징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예로 든 남명 정권의 분열상을 보면, 이는 정확히 말하면 지방 세력의 할거라기보다는 주씨 황족들을 구심점으로 삼은 중앙정부의 잔여세력 내에서 벌어진 권력투쟁과 그로 인한 의견일치 실패의 결과물에 가깝다. 남명의 사례,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례로 남송의 사례를 보면 이 두 사례는 분명 지방정권이기는 하나 '중앙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이 실추되면서 지방세력이 중앙정권의 영향력 바깥으로 이탈하여 발생한' 사례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외부의 적에 의해 중앙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도 그 잔여세력조차 여전히 강력한 지방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지방으로 도피하여 지속적인 저항을 시도할 수 있었던 사례라고 봐야 한다.(물론 이쪽 사례의 효시는 [[동진]]이다.) 요약하자면 <지방 통제력과 구심력 부족으로 나라가 분해되어 망한 사례> 가 아니라 <나라가 망했음에도 남아있는 지방 통제력과 구심력으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 사례>가 된다. 다만 그 저항세력이 150년간이나 끈질기게 버텨낸 [[남송]]의 사례와 달리, 심한 내분을 겪은 [[남명]]은 20년만에 지리멸렬해져 멸망했다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건 이는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자 지방이 분열되어 이탈한 사례>는 아니다. 그리고 앞서 동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한말에서 보이는 제국의 공중분해가 [[서진]] 멸망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황건의 난은 후한 멸망 이후 백여년간의 사회제도 개혁을 거진 서진보다도 낙후된 체제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 외에 송나라 이후 군벌 난립시대의 전형적인 사례를 찾아본다면 원말•명초 [[홍건적의 난]]을 중심으로 한 사례가 있으나, 이 경우는 중앙정부의 장악력이란 측면에서 원나라는 전대의 송나라에 비해서도 크게 퇴보하여 반원 봉기의 중심지였던 강남 지방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통제력이나 장악력이 낮은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삼번의 난]] 같은 경우, 중원 진입 직후에는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청나라가 한족 출신 항장들의 지방정권을 인정했지만 이후 통일제국으로써의 통제력을 확보하면서 지방정권(번국)들을 흡수(철번)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다만, 청나라의 멸망에서 중화민국의 성립 무렵까지 다시 한번 군벌들의 할거기를 거치게 되지만. 결국, 송나라 이후 역대 중국의 통일왕조 멸망사를 보면 일단 이민족 왕조는 한족 왕조에 비해 지방 통제력이 약한 편이었고, 반면 중앙집권을 지향한 한족 왕조에서는 멸망과정에서 외곽지역의 이탈 현상을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